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문단 편집) === 애와 어른의 싸움 === 이미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서 관동군 최정예 사단들이 전부 빠진데다가 미국과의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관동군은 완전히 잡병으로 전락했다. 일본 자체적으로도 관동군 전체 전력이 미군 4개 사단도 안되는 전력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소련군이 침략했다. 만주 전역의 승패는 모두가 예측할 수 있었다. 수적으로 소련군은 보병이 1:2, 전차와 야포가 1:4.2[* 야포 전력의 경우, 군사기자 [[이세환]]은 [[역전다방]]에서 단순 숫자만으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언급했으며, 화력과 연사력 등을 고려하면 '''1:10'''이 넘는다고 평가했다.], 항공기가 1:2의 우위를 이루었으며 무기의 기술력이나 병력의 질적 격차도 너무나 컸다.[* 일본 제국 해군은 미 해군에 [[구레 군항 공습|사실상 소멸당했고]] 애초 육지에서 벌어진 전쟁이었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의 대전차 수단이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악명높았으며 [[IS-2]]는 커녕 [[T-34-76|T-34]]를 저지할 수단은 오직 대전차 자폭조 밖에 없었다. 게다가 [[독소전쟁]]에서 수 차례의 고비를 넘긴 소련 베테랑 병사들과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 겪어본 관동군의 전투는 어떻게 될 지는 불보듯 뻔했다. 최후방 극동에서 전투 한번 겪어보지 못한 병사들도 소련에 많았지만, 이들은 열차를 타고 온 유럽 전선 베테랑들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음으로서 경험 부족의 한계를 많이 상쇄했다. [[파일:external/4.bp.blogspot.com/Kwantung-army-surrenders-to-Soviet-union-chang-chun-1945.jpg|width=500]] 소련군에 체포되어 압송되는 야마다 관동군 사령관 고위 지휘관들의 실력 또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배출한 최강의 전략가 중 한 사람인 바실렙스키 원수[* 야전지휘관이 아니라서 주코프에 가려졌지만, 총참모장으로서 구체적인 작전을 짠 바실렙스키는 독소전쟁 기간 중 10여 명이 쏟아져 나온 소련군 원수들에서 가장 훌륭한 능력을 가진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았으며 당시 소련에서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 2회 수여자였다.]가 작전을 총지휘했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역전의 베테랑인 메레츠코프와 말리놉스키가 전선군 사령관으로 최전선에서 지휘하는데다가 류드니코프, 루친스키, [[이반 치스차코프|치스차코프]], 벨로보로도프, 크릴로프 등 독소전쟁에서 몇 년 간 구른 경험 많고 유능한 지휘관들이 소련군에 배치된 반면, 관동군은 총사령관인 야마다 오토조부터가 실전 경험이라고는 [[중일전쟁]]에서 고작 1년 남짓 참전해 놓고서는 기병학교 교관 노릇 하다가 대본영에 배치되어 태평양전쟁 내내 대본영 참모로 일하다가 관동군 사령관이 된 인물이었다. 만주군 사령부는 물론 병사들도 경험이 부실했지만 소련군은 사령부부터 유럽에서는 빛을 보지 못 했지만 분명 훌륭한 역량을 가진 사령관들로 채워졌고, 병사들 역시 유럽 전선에서 싸웠던 베테랑들을 중심으로 빈약했던 극동군을 재편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 작전의 중요한 지점들은 소련군이 '어떻게 이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겼는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